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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람세스 3세와 바다사람들 : 나일 강 전투

by 전쟁사 소개 2024. 11. 18.
이집트 비문에 ‘해외에 있는 바다사람들’로 언급된 이 침략 세력의 정체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바다사람들은 그리스와 지중해 섬들에 기원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두 개의 구별되는 집단으로 파악했다. 이집트인들에게 셰르덴으로 알려진 한 집단은 트로이에서 싸웠던 애치언족이 착용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뿔로 된 헬멧을 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론에 따르면, 트로이 포위 공격의 끝 무렵이 람세스 3세의 통치가 시작되던 시기와 가깝다고 본다.

두 번째 집단은 수직의 줄기들이나 새의 깃털들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 펠레셋족인데, 이들은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을 낳은 팔레스타인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과 양떼로 구성된 거대한 이주민 집단인 이들 펠레셋족은 BC 12세기 동안, 한때 융성했던 히타이트 제국을 일거에 휩쓸었다.

 

바다사람들의 배 이것은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용도의 배이다. 노나 패들 또는 삿대 추진 장치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순수한 항해용 배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이집트 갤리선들의 쇠돌기 전술에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곤 했다[네이버 지식백과] 람세스 3세와 바다사람들 : 나일 강 전투 (해전의 모든 것, 2010.05.17., 이에인 딕키, 마틴 J. 도헤티, 필리스 J. 제스티스, 크리스터 외르겐센, 롭 S. 라이스, 한창호)

 

 

셰르덴족과 펠레셋족이 붕괴되고 있던 히타이트 제국 남부 지역에서 합세했을 수도 있다. 주력군이 시나이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로 진격하는 동안, 바다사람들의 배가 앞장서서 나일 강 삼각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동이 빠르지도 은밀하지도 않았으므로, 람세스 3세는 적들의 전력을 파악해 응전할 준비를 갖출 시간이 충분했다.
리비아족과 맞닥뜨린 동부 삼각주에는 람세스의 뜻대로 움직이는 두 개의 부대가 있었다. 왕국의 중심부(아마도 테베)에 또 다른 부대가 예비군으로 남아 있었고, 나머지 한 부대는 누비안족과 면한 남부에 있었다. 병사들은 군복무 의무 대상 10명 중에 1명꼴로 징집되었다. 이집트 주민이 대략 10만 세대로 조직되어 있음을 감안할 경우, 매년 1만 명의 신병이 활용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집트 병사의 군복무 기간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람세스 4세 치하에 남부로 원정을 떠났던 군대가 비전투요원을 포함해 8,362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만일 이 정도 병력이 남부지역 부대의 일부이고 부대의 3분의 2가 배후에 남았다고 가정할 경우, 이집트는 복무 기간 10년의 대략 2만 5,0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보병은 250명, 기병은 50명 단위로 편성되었다. 군 경찰도 이 부대와 동행했다.

람세스는 함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육군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제국의 외곽에서 온 부족들이 보조 부대로 징집되었다. 람세스는 이 부족들의 일부를 정찰병과 밀정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격하는 유목민 무리와 보다 쉽게 뒤섞일 수 있어서, 적 함대의 최종 목적지를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해안에는 많은 상륙 가능 지점이 있는데, 람세스가 ‘바다사람들’의 상륙 지점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다가올 전투를 위해 람세스는 육상 병력을 수에즈에서 북쪽으로 대략 8킬로미터 떨어진 피람세스로 불러들였고, 나일 강과 해안 지역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선박을 징발했다.

 

 

이 이집트의 바스 릴리프(bas-relief, 살 두께가 얇은 부조—옮긴이)는 BC 1200~1100년 경에 두려움에 빠진 ‘바다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갈릴리의 이달 알론 박물관 소장품이다.

 

람세스의 전함은 측면마다 10개의 노, 위에 망대를 갖춘 돛대 하나, 배의 전후 방향에 있는 두 개의 갑판, 조정을 담당한 한 개의 노를 장착하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금속(아마도 청동)을 입힌 사자 머리 모양의 쇠돌기가 있었다. 투석전사 1인이 돛대 위 망대에 자리 잡았고, 쇠갈고리를 든 병사 1인이 앞갑판에 자리 잡았으며, 뱃머리엔 승선용 창을 휘두르는 병사가 있었다. 육군에서 차출되어 해군 병사로 훈련된 나머지 전투 승무원은 활이나 창으로 무장했다.
해군 병사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아마로 된 킬트를 입었는데, 가죽 조각으로 더욱 보강할 수도 있었다. 병사들은 허리 위로 천을 덧대 기워놓은, 겹쳐진 청동 비늘 모양의 갑옷을 착용했다. 투구도 갑옷과 같은 식으로 만들어졌다. 함정에 탄 병사라 해봐야 불과 50명 정도였으므로 노를 젓는 병사들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

이집트 함정의 선체는 중앙이 눈에 띄게 튀어나왔고 비교적 협소해서 16미터 길이에 너비가 단지 2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모양새 덕분에 이집트 함정은 노 젓기에 꽤 괜찮은 형태를 갖추었다. 함정의 측면은 노 젓는 병사들의 지휘관을 제외한 모두를 보호하기에 충분할 만큼 높았다. 메디넷하부 기념비와 네페르티티 여왕의 대형 함재선(바지선)에는 배들의 이물(뱃머리)과 고물(선미)이 흘수선 위로 우아한 호를 그리며 더욱 확대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배에 달린 나뭇잎 모양의 노가 선체 측면에 나와 있고, 노잡이들은 고물 쪽을 향해 있다. 선체의 널빤지가 섬유질 로프와 함께 묶여 있었다. 또한 선체는 마른 나무로 건조되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체가 젖으면, 널빤지가 팽창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밧줄을 팽팽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바다사람들의 함정은 갑판과 망대를 갖추었으나 쇠돌기나 노가 없는 모습으로 이집트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바다사람들의 배에도 노가 있었겠지만, 드러나 있지는 않다. 배의 이물과 고물이 오리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듯하다. 선원들은 창을 사용했으나 활은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바다사람들 역시 이집트 병사가 입었던 무릎까지 내려오는 킬트를 착용했다. 허리 위로 착용하는 그들의 갑옷은 이집트 병사의 것과 유사하게, 가죽과 두터운 허리 갑옷이나 덧댄 가죽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이집트 함정의 쇠돌기가 적선을 들이받으면, 배가 쓰러지면서 적선의 병사들 다수가 물속에 빠진다. 그러면 이집트 함정은 또 다른 적선을 찾기 위해 뒤로 물러난다. 뒤집힌 적선은 나중에 비교적 원상태로 복구될 수 있어서 ‘전리품’의 일부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람세스 3세와 바다사람들 : 나일 강 전투 (해전의 모든 것, 2010.05.17., 이에인 딕키, 마틴 J. 도헤티, 필리스 J. 제스티스, 크리스터 외르겐센, 롭 S. 라이스, 한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