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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와 남부 패배의 시작

by 전쟁사 소개 2024. 11. 18.

빅스버그를 탈환하고 미시시피를 차지하라!


샤일로에서의 승리로 서부 테네시가 온전히 북부의 손에 들어왔고, 뉴올리언스까지 점령하면서 북부는 미시시피강을 거의 장악하였다. 남부는 미시시피주 빅스버그(Vicksburg) 인근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미시시피강 유역을 거의 상실하였다. 즉, 텍사스-아칸소와 남부연합의 동부 지역은 빅스버그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위태위태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빅스버그는 이미 요새화되어 있었고, 남북 전쟁 발발 이후 그 수비는 더욱 강화되어 남부 정부는 빅스버그를 두고 ‘남부연합의 지브롤터’라고 할 정도였다.

 

빅스버그를 둘러싼 북군 그랜트와 남군 펨버턴과 존스턴의 움직임. 미시시피강의 요새였던 빅스버그는 양군 모두에게 반드시 탈환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




북군 수뇌부도 빅스버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1862년 5월과 6월에 함대를 동원하여 빅스버그를 포격해보았으나 격퇴당한 적이 있다. 아울러 당시는 브래그(Braxton Bragg)가 켄터키에서 북진에 나서면서 미시시피주 북부에 또 다른 병력을 주둔시켰고, 빅스버그의 공략을 맡은 그랜트의 테네시군(Army of the Tennessee)은 남부 야전군을 상대하느라 빅스버그를 제대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브래그가 켄터키에서 철수하고 그랜트가 코린트에서 프라이스와 밴도른의 남군을 대파하면서 빅스버그에 대한 공략이 다시 재개되었다. 1862년 12월에 테네시군 수뇌부는 셔먼의 15군단으로 빅스버그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도강 지점이 늪지대여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빅스버그의 남군 수비대를 이끌고 있던 것은 특이하게도 북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존 펨버턴(John Pemberton) 중장이었다. 펨버턴은 빅스버그에 대한 북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빅스버그 주변을 참호로 둘러싸인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빅스버그를 수비하고 있던 존 펨버턴(John Pemberton). 북부 펜실베이니아 출신이었던 그는 남군 내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랜트는 빅스버그 공격에 앞서 물이 많은 주변의 지형을 바꾸기 위해 운하를 뚫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늪이 많은 강의 서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그랜트는 1863년 5월 2일에 철갑선들의 호위하에 빅스버그 남쪽의 그랜드 걸프(Grand Gulf)에서 수만의 병력을 미시시피강의 동쪽으로 도강시켰다. 이때 펨버턴이 수비 대신 도강하는 병력을 정면으로 공격하였으면 북군이 매우 곤란할 수도 있었지만, 펨버턴은 빅스버그 인근을 떠나지 않았다. 북부 출신으로 남군의 고급장교가 된 펨버턴은 남군 내에서 극심한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랜트와 충돌했다가 패배할 경우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펨버턴은 중요한 순간에 보신(保身)을 택하고 말았다.

아울러 그랜트는 남군의 수비를 방해하기 위하여 기병으로 구성된 기습 부대를 남부 깊숙이 진격시킨다. 기병대를 지휘하게 된 그리어슨(Benjamin Grierson) 대령은 어린 시절 말 뒷발에 채이는 사고를 당하여 말이란 동물을 극도로 싫어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주어진 1700의 기병대를 의외로 잘 이끌었다. 그리어슨의 기병대는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주 북부를 횡행하였고, 스트레이트(Abel Streight) 대령이 이끄는 또 다른 기습 부대는 남부 테네시군(Confederate Army of the Tennesee)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임무를 띠고 앨라배마 쪽으로 향하였다. 스트레이트가 남군 네이선 포레스트(Nathan Forrest)의 기병대에 포로로 잡히면서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리어슨은 4월 17일에서 5월 2일까지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를 마음껏 분탕질하며 남군을 괴롭혔다. 그리어슨의 기습대는 철로를 뜯어내고 물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열차 차량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 보급소를 때려부수고, 교량을 파괴하고, 중요해 보이는 건물에는 무조건 불을 질렀다. 피해를 견디다 못한 남군 기병대가 열심히 그의 군대를 쫓았지만, 그리어슨의 1700 병력 중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7명, 그리고 실종 9명에 그쳤다. 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채 그리어슨의 기병대는 유유히 북군이 점령하고 있던 배턴루지(Baton Rouge)로 들어갔다. 펨버턴은 그리어슨의 기병대를 잡으려 기병과 보병을 파견하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미시시피의 주도인 잭슨에서 펨버턴을 지원하기 위하여 주둔하고 있던 남군 존스턴(Joseph Johnston)의 미시시피군(Army of the Mississippi) 또한 그리어슨의 기습으로 섣불리 군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만약 존스턴의 미시시피군과 펨버턴의 수비군이 힘을 합쳤더라면 북군에 맞먹는 병력으로 맞설 수 있었으나, 북군의 매클렐런처럼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탈이었던 존스턴은 잭슨 인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5월 12일에는 펨버턴이 직접 나서서 빅스버그의 고립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레이먼드(Raymond) 전투에서 패하였다. 그랜트는 이어 존스턴에 대한 적극적인 공략을 펼쳤고 존 맥퍼슨(John McPherson) 소장 휘하의 17군단을 잭슨으로 보냈다. 맥퍼슨이 잭슨 인근에 도착하였을 때 잭슨에는 남군 수비병 6천밖에 없었다. 남군의 존스턴 대장은 시가전으로 도시를 파괴하기보다는 물러나는 쪽을 택하였고 그레그(John Gregg) 준장에게 본군이 물러날 때까지 잭슨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5월 14일 존스턴의 부대는 잭슨에서 철수했고 그레그 준장 역시 이를 따랐다. 잭슨을 점령한 북군은 도시에 불을 지르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였다. 중요한 것은 잭슨에서 빅스버그로 가는 철로를 끊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잭슨은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빅스버그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사실 존스턴이 며칠만 버텼으면 증원군을 받아 15000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너무도 빨리 철수를 명하는 바람에 빅스버그의 수비군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5월 16일 남군이 다시 잭슨에 들어왔을 때 잭슨은 불탄 건물로 가득하였다.

 

 

빅스버그의 함락, 둘로 갈린 남부연합

빅스버그를 포격하는 북군의 철갑선단.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북군은 미시시피강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남부를 둘로 갈라놓는다.



펨버턴은 여전히 존스턴의 군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재차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5월 16일 챔피언힐(Champion Hill)에서 잭슨에서 철수한 그랜트의 테네시군 본대와 조우하였다. 펨버턴은 또 다시 패하고 다시 빅스버그를 둘러싼 참호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펨버턴의 뒤를 쫓는 그랜트의 군은 5월 18일 빅스버그 인근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바로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어 5월 22일에 방어선을 뚫기 위한 재차 돌격을 명하였지만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빅스버그 전투에서 쓰인 양군의 참호망은 그 규모만해도 엄청났다. 이곳에서 남과 북은 두 달 넘게 대치하면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남군의 참호선이 정면 돌격으로는 뚫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랜트는 참호전에는 참호전으로 맞서기로 한다. 그랜트는 보방(Sebastien Vauban)의 참호 전술을 모방하여 평행 참호와 함께 지그재그로 참호망을 구축하였다. 양군의 참호망은 그 규모가 엄청났는데, 어떤 곳에서는 양군 참호 사이의 간격이 십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양군은 두 달이 넘게 대치하면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남군은 비축한 포탄으로 북군을 포격하였지만, 북군은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워 남군을 압박하였다. 북군 포병대는 빅스버그에 매일 7만 발의, 그야말로 ‘포탄비’를 선물하였다. 육상에서 발사되는 7만 발의 포탄에다 강을 거슬러 올라온 북군 함선들에 의한 함포사격이 더해지면서 빅스버그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빅스버그의 시민들은 결국 살기 위해서 시가지를 떠나 빅스버그 주변 고지에 굴을 파고 생활하였다. 펨버턴의 남군과 빅스버그의 시민들은 어떻게든 북군의 공격을 버티어내려 하였지만 빅스버그는 완전히 고립된데다 보급까지 끊긴 상태였다. 5월이 가고 6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6월 말에는 식량마저 떨어져 짐을 운반하기 위한 나귀와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6월 28일… 건강하고 살찐 나귀들을 골라 도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외에도 쥐를 잡기 위한 덫들이 설치되었다. 쥐고기의 소비가 워낙 많았기에 포위가 끝날 때 즈음에는 쥐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6월 25일에 북군은 남군의 참호 밑으로 갱도를 파고 폭파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남군은 북군이 갱도를 파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북군의 갱도 밑으로 굴을 파서 붕괴시키려 하였지만 땅속에서 방향을 잃고 실패하였다. 다음날 새벽 3시에 북군은 남군의 참호선 일부를 폭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폭약이 넓게 폭발하지 않아 좁은 통로만이 생겼고 남군의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남군은 재빨리 폭발지역 바로 뒤쪽에 참호를 재구축하였다. 그랜트는 어찌되었건 새로이 생긴 통로를 돌파구로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24시간 동안 20개 여단을 교대로 투입하였지만, 좁은 통로를 지키기는 너무 어려웠고 폭파 작전이 성공한지 불과 하루만에 새로 생긴 돌파구는 다시 남군의 차지가 되었다. 7월 1일에 재차 폭파작전이 시도되었으나 폭파 지역으로 돌파하려 나서는 병사가 없어 작전은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완전히 고립된 데다 보급까지 끊긴 채 굶주림과 더위, 계속되는 포격으로 폐허가 된 빅스버그. 결국 1863년 7월 3일 남군 펨버턴은 북군 진영에 항복 사절을 보낸다.


그러나 폭파 작전의 실패에 상관없이 빅스버그의 수비군과 시민들은 더 이상 굶주림과 더위, 그리고 계속되는 포격을 견딜 수 없었다. 펨버턴은 구원군이 올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함을 깨닫고 7월 3일에 북군 진영으로 항복 사절을 보낸다. 그랜트는 도넬슨 요새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펨버턴은 명예로운 항복을 할 수 없으면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에 그랜트는 남군 병사들이 총과 포를 버리고 모든 물자를 남겨두며 장교들은 권총만을 휴대하고 맨몸으로 북군 진영을 통과하여 철수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허락하였다.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남부는 둘로 갈리게 되었으며 북군은 미시시피강은 장악할 수 있었다. 미시시피강은 완벽히 북군의 수송로가 되었고, 텍사스와 아칸소는 남부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서 노장 스콧이 입안한 아나콘다 작전대로 북부는 남부의 숨통을 쥐게 되었다. 빅스버그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남북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전투였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시작

챈슬러즈빌 이후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은 추가로 병력이 증강되어 군세가 7만 6천으로 늘어났다. 리가 북군의 번사이드와 후커를 연이어 격파하자 북군 수뇌부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리에 대한 공포감이 조성되었고, 남부에서 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남부의 연승과 리의 위광(威光)이 드높아짐에도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남부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인하여 남부는 ‘노예국가’라는 낙인이 찍혔고 유럽 국가들은 대놓고 노예국가를 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극단적인 반전론자들을 제외하면, 다소 친남부적인 메릴랜드는 물론 북부 어디에서도 종전협상론에 대한 지지는 없었다.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고 북부를 황폐화시킨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리는 북부를 재차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리는 북부 버지니아군 7만 6천을 진두지휘하며 다시 북진에 나섰다. 남군은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향했는데, 앤티덤 전투때와는 달리 남군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메릴랜드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을 도우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고, 남군은 그대로 펜실베이니아로 진군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는 북부의 곡창지대였고, 펜실베이니아의 농장들을 약탈하면 자신들의 보급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북부 주민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 리의 계산이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목표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주로 진격한 또 다른 이유는 펜실베이니아 주도(主都)인 해리스버그(Harrisburg)를 통과하는 철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펜실베이니아의 농산물과 서부에서의 물자가 유입되는 곳으로 이를 끊으면 동부에서 작전 중인 북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급의 확보과 철도의 단절이라는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기 위하여 리는 정찰대와 약탈 부대들을 넓은 지역에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 약탈 부대의 일부가 인근에서 남군의 행방을 찾고 있던 미드(George G. Meade)의 북군과 충돌하게 되면서 남북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가 벌어지게 되었다.


약탈 부대의 보고를 통하여 북군이 가까운 곳에 와 있음을 확인한 리는 재빨리 흩어진 군을 집결시키고 보병대 일부를 급파하여 인근의 소도시인 게티즈버그를 장악하게 하였다. 주변의 도로가 모이는 곳인 동시에 게티즈버그에는 신발 공장이 위치해 있어 거의 맨발로 다니고 있던 남군들의 신발 보급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를 거쳐 펜실베이니아로 북진한 남군(붉은색)의 경로와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이 된 미드가 지휘하는 북군(파란색)의 경로. 양군의 게티즈버그에서 7월 1일부터 3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출처: (cc) Hlj at en.wikipedia>



리의 약탈 부대와 최초로 만난 북군 부대는 새로이 포토맥군의 수장이 된 미드가 내보낸 기병정찰대였다. 6월 28일에 후커가 사임한 후 사령관이 된 미드는 즉시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뷰포드(John Buford) 휘하의 정찰대를 내보냈는데, 뷰포드의 정찰대가 7월 1일에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남군 부대 일부를 발견한 것이었다. 뷰포드는 힐(A.P. Hill)의 남군 부대와 2시간 동안 물러나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지만, 이웰(Richard Ewell)이 거느린 남군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뷰포드는 물러나면서 게티즈버그의 남쪽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고지(高地)인 세메터리릿지(Cemetery Ridge)에 부대를 포진시켰다.


리는 이웰에게 세메터리릿지를 점령할 것을 주문하였다. 미드가 남군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부대를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을 것이므로, 미드의 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인근의 고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가 이웰에게 내린 명령문에는 ‘가능하면’ 고지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웰은 세메터리릿지에 포진한 북군의 수비가 너무 단단하다고 여기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남쪽에서 북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였고 세메터리릿지의 북군 방어진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만약 기회를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잭슨이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으나, 앞서 말했듯이 잭슨은 첸슬러즈빌에서 전사한 뒤였다.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릿지로 속속 도착함에 따라 북군은 세메터리릿지를 따라 길게 수비진을 구축하였다. 아울러 세메터리릿지의 왼쪽인 컬프스힐(Culp’s Hill)에도 방어선을 만들고 남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게티즈버그 북쪽에 있던 리는 북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만든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였다. 일단 리는 양면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시 공격이 아니고 적절히 시차를 두어 공격할 계획이었다. 롱스트리트의 군단으로 세메터리릿지의 북군 좌익을 먼저 치면 위기에 몰린 좌측을 구하기 위하여 미드가 컬프스힐에 있는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좌측을 보강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본군으로 컬프스힐을 공략하여 돌파한다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고지에 자리를 잡은 적을 치는 대신 전군을 남쪽으로 돌릴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 남군 병력 전체가 워싱턴 DC를 향하게 되고 결국 미드는 남쪽으로 가는 남군을 막기 위하여 고지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어찌보면 합리적인 건의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리는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일설에는 전투 전의 경미한 심근경색 증세로 인해 리의 정신이 다소 혼미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리가 자신감을 넘어 자만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에서 북군을 연파하였고, 병사들은 여러 전투를 통하여 경험을 쌓았으며, 많은 보급 물자를 노획하였기 때문에 군의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다. 사기가 충천해 있는 데다 경험 많은 자신의 군이 (그가 생각했을 때) 사기도 떨어지고 겨우겨우 훈련을 마친 북군 풋내기들과 싸워서 질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퇴각하는 남부, 기우는 전쟁


롱스트리트는 리의 거부를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찌되었건 명령은 명령,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북군 좌측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클즈(Daniel Sickles)의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릿지의 남쪽 끝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시클즈는 좌측끝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있었지만, 단순히 지키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마음대로 원래의 방어선에서 보다 앞으로 나온 것이다. 롱스트리트는 시클즈의 북군 병력 뒤에 있는 리틀 라운드 톱(Little Round Top)이라는 언덕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원래는 시클즈의 방어선 끝에 있어야 했지만 시클즈가 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함부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남군에게 노출된 것이다. 만약 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북군의 진지를 완전히 우회함은 물론 야포를 올려보내 노출된 북군 진지를 뒤에서 포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명령은 우선 세메터리릿지의 북군을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의 공격은 시클즈의 부대에 집중되었고 시클즈의 부대는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드는 시클즈의 부대가 위치를 이탈해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방어선을 보강할 방법을 찾았고, 군 공병감인 워런(Gouverneur K. Warren)을 보냈다. 워런은 주변에 있던 사이크스(George Sykes) 소장의 5군단에서 한 부대를 차출하여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이크스에게 보낸 전령이 돌아오기 전에 워런은 마침 인근에 있던 스트롱(Vincent Strong) 대령의 여단을 만났고, 스트롱은 자신이 나사서 휘하 4개 연대를 리틀 라운드 톱에 올려보내달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시클즈의 부대가 한창 남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리틀 라운드 톱에는 미시간 제16연대, 펜실베이니아 제83연대, 뉴욕 제44연대, 그리고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e)의 메인 제20연대(20th Maine Regiment)가 올라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로써 기회가 되면 리틀 라운드 톱을 차지하려고 했던 남군은 ‘닭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1번2번
좌 1번 / 우 2번

 


1 치열한 격전지였던 리틀 라운드 톱. 남군 부대가 수차례 돌격해와 위기를 맞았으나 결국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면서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2 리틀 라운드 톱에서 메인 제20연대 병사들에게 ‘착검 돌격’을 명함으로써 북군을 위기에서 구한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 남북 전쟁 이후 메인주에 있는 보든칼리지(Bowdoin College)의 총장을 역임하고 메인주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이를 본 후드(John Bell Hood) 소장 휘하 로(Evander law) 준장의 남군 부대가 리틀 라운드 톱에 대한 전면 공격을 펼쳤으나 수차례의 돌격이 모두 격퇴되었다. 그러나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는 북군의 병력이 부족하였던 탓에 7월 2일 저녁에 위기를 맞았다. 참호선 왼쪽 끝을 지키고 있던 메인 20연대는 남군의 돌격을 막아내느라 사상자가 늘어 싸울 만한 병력이 부족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탄약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연대장 체임벌린은 남군이 돌격해오기 전에 연대 병력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착검!’을 명한 다음, 진격해오는 남군에게 돌진을 명하였다. 공격 시작 전, 체임벌린은 자신의 연대 좌측을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포진시켰다. 체임벌린의 명령에 따라 20연대는 90도 직각을 이루어 남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돌격해오고 있던 남군 병력은 마치 닫히는 문 안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고 남군의 돌격은 멈추었다. 리틀 라운드 톱의 전투는 다음날 5군단 소속 제3사단이 구원에 나서면서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고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더불어 컬프스힐에 대한 남군 본대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면과 측면 공격에 모두 실패한 리는 딜레마에 빠졌다. 물러나자니 미드가 이끄는 포토맥군의 추격이 이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공격을 하기에는 북군의 수비가 견고해 보였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비록 좌측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약하니 북군의 좌측을 우회할 것을 재차 건의하였지만, 리는 다시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고 북군 중앙에 대한 돌격을 결정한다. 이틀간 계속된 전투로 북군 본대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마침 증원군 1만이 도착하면서 리는 증원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여 돌파한 뒤, 돌파구로 예비 병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7월 3일 오후 1시경 남군 포병대가 북군 중앙에 포격을 개시하였고, 이 포격은 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북군 포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고 포격을 그쳤다. 그리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남군의 포격을 바라만 보았다. 남군은 자신들의 포격이 북군 포병대를 궤멸시켰다고 생각하고 피켓(George Pickett) 소장의 병력 1만에다 힐 소장의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15,000의 돌격대를 만들었다.


오후 3시경,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고 알려진 돌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시작 지점으로부터 북군의 진지까지는 약 1km 정도였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개활지였다. ‘돌격’의 시작은 비교적 조용했고, 처음 20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군이 개활지의 중간쯤에 도착하자 북군 포병대의 대포 80문이 일제히 발포를 시작하였다. 남군의 포격이 개시되자 곧 돌격이 이어질 것임을 눈치챈 포병대장이 발포를 멈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제히 포문을 연 것이다. 동료들의 팔다리가 떨어나가고 머리와 옷에 불이 붙어 불덩어리가 되는 지옥 속에서도 피켓의 군단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북군 진지로부터 약 200야드 지점에 이르자 언덕 위의 북군 보병들도 사격을 시작하였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의 병력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일부는 북군이 있던 방어선에 난입하여 육박전이 벌어졌다. 만약 남군이 제 2파를 보냈다면 돌파가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남군에게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드는 전날 저녁에 1만의 증원군까지 받은 후였다. 남아 있는 돌격대로는 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여력이 없었다. 남군은 올라온 길로 다시 후퇴를 시작하였고, 피켓의 돌격은 결국 7,500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을 맞아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세메터리릿지의 북군. 게티스버그의 패배 이후 전세는 북군 쪽으로 기운다.

 

남군은 다음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버지니아로 긴 퇴각을 시작하였다. 이전의 북군 사령관들이 그러하였듯이 미드는 리의 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이때 공교롭게도 쏟아지는 비로 포토맥강이 갑자기 불어나 남군은 강가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만약 미드가 전군을 몰아 추격하였더라면 포토맥 강변에 고립된 리의 군을 궤멸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드 역시 갑작스런 소극성으로 그럴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만 자명한 사실은, 남군이 게티즈버그에서 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최고점이었다. 게티즈버그 이후 남군과 남부의 기나긴 2년 간의 몰락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