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이후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독일의 여러 영방들이 각자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된다. 유럽의 서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부에서는 러시아가 국가권력을 강화하며 국력을 한창 끌어모으고 있던 상황에서 중부 유럽은 ‘군웅할거’의 구심력 공백지대가 된 것이다. 자연히 이 지역 내부의 잦은 갈등에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개입과 세력 확장을 노린 동맹관계 형성이 이어지면서, 18세기 전반기의 유럽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점철된다.
그 중에서도 뒷날 윈스턴 처칠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일컫게 되는 7년 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까지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물론 그것은 독일을 주 무대로 유럽 전쟁이 벌어지던 중 그 전쟁 당사국들 일부인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이 해외 식민지 쟁탈전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벌인 것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가 양편으로 갈라져서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의 종교전쟁에서 근대의 국민국가 전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이 시기에, 당시 유럽의 주요 세력이 대부분 참여하여 국력을 쏟아 부었던 7년 전쟁은 전쟁사에서나 세계사 전체에서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프리드리히와 마리아
신성로마의 깃발이 빛이 바랜 뒤,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세력은 그래도 황제 자리를 유지하면서 헝가리, 이탈리아 일부 등까지 영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 의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그 우위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나타났는데, 바로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인구도 적고(유럽 국가들 중 20위였다), 영토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데다 산맥이나 큰 강 같은 자연적 방벽에 기댈 수도 없었기에 강국이 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대 선제후”라 불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1640~1688) 이래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쓰면서, 지방 영주들(융커)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토지세를 걷어 대규모 상비군을 마련하고(유럽 국가들 중 3위에 이르렀다) 엄격한 군율과 잘 정비된 관료조직으로 그 군대를 단련하면서 점차 누구도 얕볼 수 없는 프로이센으로 발전해갔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결이 끝내 무력 충돌로 이어진 것은 양국에서 두 젊은 군주가 즉위한 1740년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를 6세(Karl VI, 1685~1740)가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딸인 23세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하고,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는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 (Franz I, 1708~1765)가 잇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상속권을 부정한 고대 게르만 법인 살리카 법에 어긋난다 하여 작센, 바이에른 등에서 반대가 나왔는데, 그녀보다 5년 먼저 태어나 5개월 먼저 왕이 되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도 반대편에 섰다. 다만 그는 ‘슐레지엔을 넘겨준다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오스트리아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받기로 했었는데, 아직까지 약속이 이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약속의 근거가 없다며 한마디로 이를 거부했고, 프리드리히는 ‘법보다 주먹’에 호소하기로 하고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이듬해에는 작센과 바이에른, 그리고 서쪽의 강자, 프랑스가 전선에 가담했다. 부르봉 가의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와 앙숙이었고, 라인 강 좌측의 독일 땅에 눈독을 들여오고도 있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는 독일의 여러 국가끼리 싸움을 붙이고 말리며 ‘균형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압력 앞에 마리아 테레지아도 버틸 수가 없었으며, 결국 1742년에 슐레지엔을 양보하기로 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단독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등과의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은 1748년에야 끝이 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것으로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그 ‘성공’은 많은 불안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는, 동맹국이라면서 일언반구도 없이 오스트리아와 단독 강화해 버린, 철저히 ‘내 몫만 챙기면 끝’이라는 식의 프로이센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겼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슐레지엔을 양보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 땅을 포기하지 않은 채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1744년에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였다가(제 2차 슐레지엔 전쟁) 다시 패배한 뒤에는 러시아와 비밀조약을 맺고 프로이센을 견제하기로 했다(상트페테르부르크 동맹). 여기다 영국마저 러시아와의 비밀 협상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내의 영국 영토인 하노버를 공격할 경우 러시아군이 개입하며, 그 대가로 영국은 재정 지원을 한다고 약속했음을 알자, 프리드리히는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국면을 타개하고자 외교적 ‘묘수’를 쓴다. 하지만 그 묘수야말로 프로이센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결국 7년 전쟁의 늪에 빠트리는 악수로 판명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