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전쟁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불과 연기와 비명과 총성으로 뒤덮였다. “부르봉 군주체제의 잔혹한 폭압”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이 감옥의 실체는 고작 7명의 죄수를, 그것도 별로 잔인하지 않은 식으로 감금해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분노한 대중이 총칼에 맞서 일어난 이 사건은 프랑스를, 나아가 전 세계를 뒤바꿔 놓게 된다.
프랑스는 본래 유럽의 최강자 후보에서 거의 항상 1순위였다. 너무 변두리에 있고 황야가 대부분인 러시아를 제외하면 가장 영토가 넓었고, 인구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아서 역시 러시아만이 상대가 되었다. 또 19세기에 접어들기까지도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독일, 이탈리아와 대조적으로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1494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샤를 8세부터 쉴 새 없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루이 14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프랑스 왕들은 ‘샤를마뉴의 계승자’로서 유럽 대륙의 패권국가가 되기를 꿈꿔왔다. 또한 이 나라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면해 있었기에, 멀리 바다로 나가 해외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일에도 흥미가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를 두고 계속해서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가 유럽과 그 밖의 세계에서 모두 심각한 일격을 당하고 만 7년 전쟁을 계기로 그런 ‘두 방향의 야망’이 한풀 꺾이기는 했어도, 프랑스의 저력과 팽창 가능성은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주변 국가들의 꾸준한 경계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합법적으로 즉위한 국왕이 혁명정부에 의해 목이 잘리는 사태가 빚어지자, 유럽 열강은 손을 잡고 프랑스를 공격할 명분과 이해관계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국왕 살해범”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혁명을 싹부터 짓밟으며, 프랑스의 야심 또한 억누르고자 1793년부터 181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전쟁은 그러한 ‘혁명 프랑스 대 구체제 유럽’ 사이의 전쟁의 후반부라고 볼 수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이라는 관점에서는 1337년~1453년의 백년 전쟁을 잇는, 수 백년 동안 거듭된 싸움의 최종 국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했던 관점이다. 그는 혁명 프랑스와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프랑스 최고통치자의 지위까지 이르렀고, 자신이 비록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전통에만 의지하는 구체제 유럽의 왕조 군주들과는 달리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영국을 배제한 유럽 대륙을 혁명 정신 아래 하나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유럽공동체 비슷한 체제로 재구성하는 것이며, 그 어느 전장에서도 궁극적인 적은 영국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나는 영국의 과두제 지배자들의 음모 때문에, 더 살 수 있는데도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
말에서 내리지 않는 “세계정신”
나폴레옹은 1769년에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지방귀족 샤를 보나파르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본래 이탈리아의 일부였으며,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제노바가 프랑스에 팔아치움으로써 비로소 프랑스 땅이 된 섬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졌고, 나폴레옹도 소년 시절에는 그 이상에 공감하며 대표적인 독립투사, 파올리를 존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게릴라가 되는 대신 프랑스의 사관생도가 되었으며, 프랑스 생도들에게 차별도 많이 받았으나 ‘나는 장차 너희 프랑스인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그는 특별히 월등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수학과 역사만은 뛰어났다. 1785년, 16세의 그는 수학 쪽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이었다.
그는 1793년 9월에 대프랑스 동맹군과 툴롱에서 첫 전투를 치렀는데, 그는 포병 대위에 불과했지만 프랑스군의 포대가 효과적 사격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고 고치도록 하여 적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다음, 사실상 총사령관을 제치고 전투를 주도하여 승리함으로써 일약 명성을 얻는다. 나폴레옹의 포술 지식과 리더십, 그리고 혁명기의 경직되지 않은 군 위계질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시작된 ‘국민의 전쟁 영웅’ 나폴레옹의 신화는 1796
1797의 이탈리아 원정, 1798
1799의 이집트 원정을 통해 점점 더 빛을 발했다.
그런 나폴레옹의 인기는 혁명 이후 최악이었던 총재 정부의 평판과 맞물리며 이 코르시카 출신의 ‘꼬마 하사관’에게 권력의 무게중심이 쏠리는 상황을 몰고 갔다. 정부는 이를 경계했으며 이집트 원정은 사실 그를 파리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는 속셈도 작용한 것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라인 강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밀리고 있으며 총재 정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비밀리에 귀국한다. 그리고 1799년 브뤼메르(11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1800년 5월에 다시 한 번 이탈리아를 제압하려 알프스 산맥의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었다. 험준한 지형과 보급 문제, 바드 요새를 비롯한 철통 같은 요새지를 근거로 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직면한 그는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퍼붓는 빗속에서 몸소 대포를 설치하고 사격하는 등의 분전 끝에,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를 점령했다. 그리고 6월 14일의 마렝고 전투에서는 하마터면 패배할 뻔 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탈리아 북부를 탈환하려던 오스트리아의 의지를 꺾고 파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를 거듭 쳐부순 다음 뤼네빌 조약을 맺어 이탈리아 북부는 물론 라인강 연안과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손에 넣었다. 그는 점령한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어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만들고, 스스로 그 대통령(나중에는 왕)을 겸임했다.
왕조 시대 이래 이처럼 국세가 떨친 적이 없던 프랑스에서는 더욱 국민적 인기가 높아진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만큼 그를 의심하고 반대하는 무리도 많아져서 암살 시도가 잇달았다. 이는 나폴레옹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가 후계자 없이 갑자기 죽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1802년, 영국 등과 아미앵 조약을 맺어 일시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종신 통령이 된 다음, 1804년 5월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12월 2일에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세습 군주가 됨으로써 후계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제2의 샤를마뉴가 되어 유럽의 지배자가 된다는 개인적 망상을 충족하려는 데서 나온 결정이었다.
이제 코르시카의 촌뜨기 군인에 지나지 않았던 자가 겨우 10년여 만에 프랑스의 새 왕조 건설자가 되고, 헤겔이 “말을 탄 세계정신”이라 부른 사람은 그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그러나 과연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인가?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구체제 군주들은 자국 국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황제를 인정할 수 없었다. 대혁명이 ‘말뼈다귀들’이 왕의 목을 자를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이 코르시카인은 그런 말뼈다귀 중 하나가 자신들과 같은 지위에 설 수도 있음을 보여준 셈이었으니까. 잠시 숨을 고르던 그들은 다시금 말고삐를 잡고, 프랑스를 무찌르려는 동맹군의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황제는 말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