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의 부유하고 강성한 통치자들은, 카스피 해와 북쪽으로 러시아 스텝의 경계선 지역으로부터 남쪽 산맥을 넘어 거대한 인더스 강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제국을 호령했다. 동쪽으로는 그들의 문서가 멀리 고비 사막까지 전달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 해변을 따라 파라오의 영토를 넘어 오늘날의 터키 지역인 수크드라 지방까지 이르렀다.
오로지 페르시아 제국의 아시아 방면 해안의 서쪽 지역에서만 페르시아에 반항하는 이들이 계속 존재했는데, 여기엔 호전적이고 복종할 줄 모르는 여러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다. 이 식민지들은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끼리도 분쟁을 벌였고, 에게 해 너머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도 그랬다.
BC 500년, 아시아 쪽의 그리스 도시들이 다리우스 대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스 도시들 내부의 반복되는 배신으로 점철된 오랜 전투 끝에, 압도적인 페르시아 세력이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BC 494년의 라데에서 벌인 최후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3단선 약 600척이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들이 파병한 3단선 353척을 격퇴했다. 이오니아족들의 반란 시기 동안 반란군은 종종 그리스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는 권위에 도전한 그리스인들을 혼내주기로 결심했다.
다리우스가 BC 492년에 수립한 첫 번째 작전에는 페르시아 보병의 진격을 지원하는 함대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다리우스 함대는 아토스 산 너머에서 폭풍우로 난파되어 해변으로 빠져나온 뒤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뒤, 새로운 원정대가 3단선 600척에 수송선을 더해 아시아 해안에서 출발했다. 반란에 일익을 담당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몇 개의 섬을 장악한 뒤 군대를 상륙시켜 에레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어 페르시아 함대는 병력을 마라톤 만으로 수송했다. 이 넓은 해변은 아테네에서 열심히 행군하면 단지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드넓은 벌판의 귀퉁이에 있었다. 이곳은 해군의 상륙과 기병대의 기동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기병의 경우,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나 약삭빠른 아테네군은 기동력이 월등한 적과 싸우기에 좀 더 안전한 산기슭 지대에서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구전에 돌입한 것이었다.
페르시아 보급 물자 수송대는 보병 15만 명과 수군들에게 계속해서 식량과 물을 댈 수 없었다.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페르시아군은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즈음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떠나려는 적을 상대로 아테네군은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 소식이 한 전령에 의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운동 경기인 마라톤의 시발점이었다. 7,000명이 조금 안 되는 사상자를 낸 상태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태운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를 급습하러 항해해 갔지만, 아테네군이 육상으로 행군해 먼저 도착했다. 상륙할 기회가 사라지자 페르시아 함대는 도리 없이 아시아로 철수했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BC 480년에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그의 계획은 자기 아버지의 첫 작전과 비슷했지만 규모가 훨씬 컸다. 크세르크세스가 전함 1,207척과 수송선 3,000척을 건조하거나 징발해 제국 내 해안 지역엔 배가 자취를 감출 정도였다. 함대에는 이집트와 사이프러스 및 과거 제국 내의 반항적인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차출된 배들도 포함되었다.
함대 승무원의 반 이상이 그리스인들로 채워졌다. 이 함대는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의 그 어떤 함대도 능가하지 못할 만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병사 100만 명 이상이 페르시아 군대에 소속되어 그리스를 공격하러 행군했다고 한다. 15만 명으로 추산하는 현대의 해석이 훨씬 신빙성이 있지만, 이 정도로도 엄청난 숫자이다. 이에 비해, 가장 큰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인 아테네는 전투 가능한 연령대의 남성이 겨우 3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